고성읍 김정식(남. 62)
고성군 대표먹거리 추억소환 SNS이벤트에 참석한 글이 주목돼 소개합니다
가야극장 앞마당 한쪽 모퉁이에 ‘문삼이 아재’ 내외분이 하시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합판 조각과 각목으로 얼기설기 만든 테이블과 등받이 없는 기다란 의자, 짜부라진 냄비와 풍로 따위의 소박한 조리도구가 있었다.
그곳에서 ‘비빔우동’을 먹고 화끈 달아오른 입안에 바람을 부쳐가며 웃어젖히던 것이 벌써 50여 년 전의 일이다.
까까머리 초등생 예닐곱은 우연한 기회에 ‘본전집 비빔우동’을 한번 맛보고는 평생의 단골이 되었다.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기였으니 우동값 20원을 구하려면 특별한 계획들이 동원되어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학교 용의검사, 일명 ‘때검사’였다.
천방지축으로 놀고 싸움질을 해대던 선머슴들의 손톱 밀은 연탄처럼 까맸고, 목 언저리는 사시사철 땟국물로 꾀죄죄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때검사’를 실시했는데, 본전집 우동을 먹고 싶어 하던 우리에게 이것이 좋은 빌미가 되어 주기적으로 때검사 핑계를 대며 돈을 타냈다.
때검사에 걸려 선생님께 혼나지 않으려면 목욕탕에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허풍을 떨어가며 부모님께 100원을 받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대단한 비밀임무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일제히 성남탕 앞으로 집결했다.
학생들이 단체로 가면 목욕비를 할인받을 수 있었기에 우리는 80원씩을 목욕비로 내고 20원을 거슬러 받았다.
이 20원이 바로 우리들의 특별한 외식을 위한 비자금이었다.
우리들은 때는 미는 둥 마는 둥 어푸어푸거리며 놀다가 본전집으로 향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제법 큰손님인 양 거드름을 피우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문삼이 아재’ 내외분은 뚝딱뚝딱 우동을 만들어 양은냄비 하나씩을 우리 앞에 착착 내려놓았다.
알싸하게 매운 향이 군침을 돌게 하고 향긋한 쑥갓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고소한 김 가루가 퍼져있는 뜨끈뜨끈한 우동 국물부터 한 모금 꿀-꺽 넘기면, 이야! 최고다! 고작해야 열서너 살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구수한 멸치 육수에 칼칼한 후추 맛이 더해진 국물은 진-짜 끝내줬다.
우리들은 한 손으로 냄비를 잡고 한 손으로 것가락을 홱홱 휘둘러 붉은 양념이 고루 배지도 않은 면발을 후루룩 먹었다.
하-하- 입에서는 불이 댕기지만 그 매운맛은 치명적이었다.
단무지를 우격우걱 씹으며 더 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콧물을 훌쩍이고 우동 국물을 홀짝였다. 콧잔등과 이마에 송송송 배어 나온 땀을 손등으로 옷으로 쑥쑥 닦는 동안 목욕탕에서 씻고 나온 몸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가야극장 앞에 있던 비빔우동 포장마차는 성내지소 앞으로 옮겼다가 목화예식장 앞, 다시 동천탕 앞으로 이전을 했다.
이때 비로소 근사한 가겟집을 얻어 <본전집>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스무 살이 넘었다.
울산에서 직장을 다니며 나는 본전집의 빨간 비빔우동을 한시도 잊어본 일이 없다.
술을 먹게 되면서 더더욱 그 매콤한 비빔우동 생각이 났다.
간밤에 마신 술이 깨지 않아 고생을 할 때마다 얼큰하고 시원한 그 우동 국물을 먹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세월은 구름같이 흩어져 내 나이는 벌써 60을 넘겼다.
그렇지만 그 시절, 그 옛날 ‘본전집 비빔우동’의 맛은 여전히 잊을 수가 없다.
고성군이 고성대표먹거리로 본전집 비빔우동을 선정할 때 감격에 겨웠던 것도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본전집 비빔우동이 지금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사랑받는 먹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고성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특색 있는 먹거리로 사랑받는 날이 오기를 진정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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