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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대하여 <임진왜란의 주요사건>

기사승인 2012.05.11  12: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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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황선균
(지난호에 이어)

   
 
 ○ 원균의 체백(體魄)은 어디에?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에서 국도 77번 국도를 따라 안정조선소를 향하여 가다보면 광도면 황리 1구 435번지에 다다르게 된다. 고성 거류면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목없는 장군의 무덤 엉규이 무덤이라는 소문을 잘 알고 있지만 누구하나 묵묵부답이기에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지금은 도로옆 솔밭옆에 황토밭이 약 100여평 정도 개간 되었다. 이곳 가운데 자갈 흙더미 봉분속에 체백이 묻혀 있다. 봄이라서 쑥과 더불어 칡의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무덤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간담을 서늘케 한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던 분들이 저쪽 동네 가운데에서 <큰손식당>을 하고 있는 식당 주인 배순자씨(59세)다. 달성 배씨로 이미 17년전에 고인이 된 남편 김원도씨는 이곳에서 6백년전인 조선 초기부터 살아온 김해 김씨 집안 자손이다. 어설프게 남긴 기록보다는 구전으로 전해져 온 증거가 더 확실할거라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에 큰손식당 사장 배순자씨를 만나 사정 이야기를 하자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본인들이 한때 궁색하여 소작을 했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 젊어서 옆에 있는 무덤이 무서웠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을 따라 농사를 열심히 하였고, 농기구를 보관하기 위해 허름한 컨테이너 2개를 무덤 옆에 놓고 사용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배순자씨는 꿈속에 누군가 나타나 “나는 원 장군인데 어찌하여 나의 앞을 막고 있는가”하기에 아침상을 받은 남편에게 지난밤 꿈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 김원도씨는 매우 놀라면서 자신도 부인과 같은 꿈을 꾸었다고 말하였다. 그날 그들은 바로 컨테이너를 옮기고 풀이 무성한 무덤을 단장한 다음 제물을 차려 제사를 올렸다고 증언하였다.

 그 이후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우리들은 원균 장군 후손인데, 이 무덤은 장군의 무덤이 아니니 제사를 지내지 말라.” 고 하여 무성의한 그들의 말에 서운한 나머지 다음부터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 후 지금은 돌보는 이가 없다보니 풀만 무성하다.
 하지만, 그때 찾아온 사람들은 장군의 후손이 아닌듯하여 항상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덧붙였다.
 배순자씨의 말씀이 자신의 시조부님께서 글을 잘하지 못한 관계로 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항상 말씀하시기를 6백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살면서 중요한 역사는 잘 알고 있다고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칠천량 해전의 이야기 또한 증조 할아버님이 알려주셔서 알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원균이 고성 춘원포에서 중과부적으로 배를 버리고 이곳 황리 고개까지 밀려와 적병들과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하셨다고 했다.
 당시 원균의 시신은 잔인한 적들이 목을 베어 전리품으로 쓸 갑옷과 신발등과 함께 가져간 상태로 남은 시신은 삼베옷만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동강난 장도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김해 김씨 가문에서는 시신을 발견하고도 바로 무덤을 만들 수 없었는데 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얼마간 적병들이 마을의 소나무 숲에 잠복하고 있었기에 감히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부패된 시신을 낡은 베조각에 싸서 수습하고 바로 그 자리에 봉토를 만들었으나 후일 관리하는 자손도 없고 주민들은 형편이 닿지 않아 잔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해 김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온 사실이라며 배순자씨는 설명했다. 지금으로부터 415년전인 1597년(선조30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왜놈의 급습을 받고 원균은 결국 이곳 춘원포에 상륙하여 고성으로 퇴각하던 중 해안에서 약 오리 지점인 여기 돌감나무골 길모퉁이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58세의 연로한 몸으로 피로에 지친 통제사는 결국 원행 김식, 우치적 등과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 노송에 기댄채로 추격해 오는 왜놈들을 맞아 부하 3명과 같이 최후까지 싸우다 생을 마쳤다. 그 머리는 일본군들이 베어 전리품으로 가져가고 목없는 시신만 뒹굴고 있는 것을 가엾게 여겨 주민들이 양지 바른 이곳 산언덕(황리 산 435번지)에 묻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균의 묘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고증이 없다. 그리고, 일설에서는 옛날 임진왜란때 한 유명한 장수가 적에게 쫓기여 달아났다가 돌감나무골 아래 큰 소나무밑에서 죽었는데 그의 머리는 일본군들이 베어 가고 목없는 시신만 누워 있는 것을 마을 주민들이 애통이 여겨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뒤에 장군은 역적이 되어 나라에서도 그 시신을 거두어 가지 않자, 아무도 그 묘를 돌보지 않게 되었는데 그 장수의 이름은 단지 ‘엉규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1960년도 새마을 사업을 할 당시 이곳 도로확장 공사중 큰 인골이 나와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길 아래의 소나무 숲속으로 이장하여 묻었는데 그 뼈가 장대한 것으로 미루어 분명 옛 장군의 뼈라는 소문이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다음호 계속>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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